‘20여 년을 보낸 아이들이 잘 자랐다. 3km가 넘는 등하교 길을 여름에는 익어서, 겨울에는 얼어서 걸어 다녀야 하는 불편함을 슬기롭게 견뎌냈다. 늘 나비를 따라 나서던 그런 아이가 엊그제 시집을 갔다. ’

딸, 아들과 함께 설악산에서

산중이 고요하다. 깊은 산속 연구소라 늘 조용하고 한적하지만 지난 한 달 넘게 둘째 아이 결혼과 추석을 맞아 미국의 처가 식구들과 결혼식에 직접 참석하지 못 할 각지의 지인들이 사나흘씩 혹은 잠간씩이라도 머물다 갔기 때문에 소란스러운 도시 같았다. 산 속에서 사는 일이 낭만적이지만은 않지만 산에 기대어, 산을 품으며 살면서 산의 숨결을 느끼는 조용함이 이미 몸에 배었다. 처음으로 치러본 딸의 결혼식이라 정신도 없었고 지금도 꿈만 같지만 비로소 아늑하면서도 편안해 졌다.

문득 아쉬움 속에서 세월을 느낀다. 참 많은 시간이 흘렀구나!

14년 동안 잘 다니던 동아일보를 그만두고 새에 미치고 곤충에 딱 꽂혀 홀로세생태보존연구소를 시작한 지 벌써 20여 년. 딸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아빠 손잡고 서울에서 첩첩산중 이 깊은 골짜기로 들어왔을 때가. 나비가 좋다고, 나비처럼 아름답게 살고 싶다고 늘 나비를 따라 나서던 그 아이가 엊그제 시집을 갔으니.

둘째 딸아이의 초등학교 졸업식

강원도 횡성군 갑천면 하대리로 내려오면서 가장 큰 걱정이 아이들 교육 문제였다. 공부는 억지로 시킬 일도 아니고 최소한 부모들 한 만큼은 하겠지 라고 내심 자신도 했지만 못내 두려웠던 게 사실. 그러나 그렇다고 아이들을 서울에 떼어놓고 부부만 내려와서는 안 될 일이었다. 가족이 떨어져 살면서 무슨 정이 생길 것이며 얼마나 좋은 학교에 갈 것인가? 또 가족이, 가정이 풍비박산 된 후에 명문 대학은 무슨 의미인가? ‘두려움 없이 나를 따르라’하고 아이들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1997년 여름 전교생 12명뿐인 금성초등학교에 아이 둘을 전학 시키던 날을 잊지 못한다. ‘향기로운 꽃과 온갖 새를 볼 수 있고, 들로 산으로 다니면서 나비를 잡고 냇가에서 물고기 잡으면서 천국을 즐기는 거야. 그리고 순박한 시골 아이들을 통해 특별히 좋은 친구를 만날 수 있을 거야.’ 온갖 말로 안심을 시키고 학교 정문까지 데려다 주고 어서 학교로 들어가라 손짓했다. 아이 둘이 풀이 죽어 힘없이 들어가다가 정문 앞에서 갑자기 획 돌아서더니 황망한 눈빛으로 나를 한참이나 물끄러미 처다 보는 게 아닌가! 몇 시간 전까지 친한 친구들과 아무 걱정 없이 잘 지내다가 느닷없이 아무 연고도 없는 산골로 오게 되니 얼마나 낯설고 당황했겠나. 기가 막혔겠지! 충분히 이해가 갔다. 순간 내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이렇게 하는 게 맞나? 내가 미쳤지. 아이들을 볼모로 데려왔다고 늘 불만이 쌓여 있던 아내는 하루 종일 울고, 자괴감에 빠진 나는 먼 산 바라보며 하루 종일 담배를 피웠다.

둘째 아이의 결혼식

그렇게 20여 년을 보낸 아이들이 잘 자랐다. 마실 물을 구하려 1km를 걸어서 20kg 물통에 물을 채워 와야 하고 3km가 넘는 등하교 길을 여름에는 익어서, 겨울에는 얼어서 걸어 다녀야 하는 불편함을 슬기롭게 견뎌냈다. 늘 부족하게 키웠는데 모자람이 없었다고 오히려 나를 안심시키고 힘든 이웃, 어려운 사람을 보면 남김없이 내어주려는 너그러움을 배워서 아주 잘 컸다.

2004년 딸이 고2때 쓴 <나비따라 나선아이 나비가 되고>

결혼식에 신랑, 신부를 잘 알지 못하는 분이 주례를 서는 것은 불편하다고 대신에 아빠가 덕담을 이야기해달라고 해서 흔쾌히 수락을 했다. 말은 맞지만 영혼이 없어 오히려 식상할 것만 같은 이야기는 나도 싫었고. 오랫동안 고민을 하다가 벌레 이야기, 내 이야기를 했다.

“사연 없는 삶이 없겠지만 영문도 모르고 아빠 손에 이끌려 산 속으로 들어왔던 내 아이가 잘 커서 시집을 갑니다. ...중략... 저는 곤충학자로 곤충을 통해서 기후가 변하는 세상을 이해하고 이름 없었던 곤충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면서 그들을 인간의 이웃으로 만드는 등 아주 보람 있는 일을 즐기며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징그럽다 오해받고, 까닭 없이 미움 받는 벌레를 귀하게 여기고 특별하게 대접하면서 곤충이 나에게 준 선물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결혼하는 두 사람도 서로를 귀하게 여기고 특별하게 대접하면 멋있는 세상을 볼 것입니다...후략...”

겉으로 내색은 안 했지만 딸을 이역만리 머나먼 길 보낸 것 같은 슬픔과 눈에 밟힐 것 같은 그리움이 있지만 다행히 사위는 초등학교 때부터 나비를 좇으며 딸아이와 자연을 공유했던 홀로세 식구라 한 시름 놓는다. 이 또한 곤충이 준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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